[너무 심심한 분만 보시오] 수나라와 고구려

[너무 심심한 분만 보시오] 수나라와 고구려

명랑! 7 3,730
요즘, 주몽에 연개소문에 대조영까지... 헷갈리는 우리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이하 펌)


고구려가 200만 수나라 군사를 물리치는 과정


1.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은 598년(영양왕 9년), 영양왕의 요서지방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는 그 전쟁발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위 9년에 영양왕은 말갈의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다.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문제는 이 보고를받고 대노하여 한왕(漢王) 양(諒 : 수문제의 넷째아들)과 왕세적(王世績 : 나중에 당나라의 건국을 도와 이씨성을 하사받아 이세적이 된다)을 행군원수(行軍元帥 : 총사령관)로 삼아 수륙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영양왕은 말갈병을 동원해 일단 수나라 침공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요서지방을 전략 기점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영양왕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받은 수문제는 그야말로 대노하여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미 영양왕은 수나라 대군의 반격을 저지할 또 하나의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장마철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영양왕의 예측대로 6월경에 공격을 시작한 수나라 대군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왕세적이 이끄는 육군은 중국대륙의 관문인 산해관에서 출발해 요하에 이르기도 전에 홍수를 만났다. 보급은 끊기고 그나마 있던 군량미는 떠내려가고, 장마가 몰고 온 습기는 전염병을 만연시켰다.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수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해가던 수군은 바다 가운데서 폭풍우을 만나 대부분의 병선을 잃고 말았다. 수문제는 할 수 없이 그해 9월 정벌군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이때 수나라 정벌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10명 중 한두 명 꼴이었다고 한다.

수문제가 철군을 하자 영양왕은 다시 시간을벌고자 수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죄인인 체 꾸민다. 『삼국사기』와 『수서』에는 이때 영양왕이 자신을 "요동분토신(遼東糞土臣 : 요동 땅에 있는 똥덩어리 신하)"이라 표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단 영양왕의 항복을받은 수문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정벌을 단념한다. 수문제는 영양왕을 다시 고구려왕에 책봉하고 백제의 위덕왕이 자신의 향도가 되겠다며 고구려정벌을 부추기자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가 죄를 빌었고, 짐이 이를 용서했으므로 치지 않겠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정비를 강화한다. 즉위 11년(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분부, 고사(古史)를 간략히 정리하여 『신집』5권을 만들게 한다. 당시 역사서의 편찬작업은 왕권을 강화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이문진이 참고한 고사라 함은 고구려 초기에 어느 학자가 한문을처음으로 사용하여 만든 『유기』란 역사책이다. 애석하게도 이 『신집』과 『유기』 등의 역사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내부체제를 가다듬은 영양왕은 북쪽 국경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공격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항해 실패한다. 604년(즉위 15년), 수나라를 세웠던 문제가 둘째아들인 양광(楊廣)에게 살해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는 다시 긴장국면으로 접어든다. 양광은 황태자였던형 양용(楊勇)을 폐하고 수나라 제2대 황제로 즉위하는데, 이 광기에 찬인물이 바로수양제(隨煬帝)이다.


2. 고구려와 수나라의 2차 전쟁

수양제는 200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대운하를 만들었다. 또한 거의 400여 년 동안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을 통일한 자부심으로 거대한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도읍인 하북성 강릉(江陵)을 서경(西京)이라 명하고 대운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 진 낙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설치했다.

수양제에 의한 제2차 고구려 침공은 영양왕이 수나라 입조를 거부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입조의 요구는 명분이었을 뿐, 사실 수양제는 고구려가돌궐과 손잡고 오히려 수나라를 침공해 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수양제는 먼저 돌궐을복속시키고 고구려를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영양왕은 수양제의 입조 요구에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전쟁을 택했다. 그리고 은밀히 돌궐과 접촉했다. 당시 돌궐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계민(啓民)이란 추장이었다. 영양왕은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어, 압박해 ㅇ는 수나라를 견제하려고 했다.

607년(즉위 18년) 영양왕은 돌궐의 계민에게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수양제가 복속을 표시한 계민의 막사에 행차했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실리를 취하던 계민은 고구려 사신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함께 수양제를 알현했다. 그동안 입조를 거부하던 고구려가 돌궐과 은밀히 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수양제에게 신하 배구(裵矩)란 자가 충종질을 했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의 봉지(封地)로, 한나라와 진나라가 군현으로 삼았던 곳인데, 지금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남의 땅이 되었습니다. 선제(수문제)는 이를 치려고 하였으나 양량(한왕) 등이 불초하여 출사의 공을거두지 못하였는바 폐하의 시대에 어찌 그것을 취하지 않고 오랑캐의 땅으로 내버려 두겠습니까? 계민이 이 나라를 들어 우리에게 복속함을 지금 고구려의 사자가 직접 보았으니, 저 사신을 위협하여 고구려왕으로 하여급 입조하게 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수양제는 그 말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명을 전했다.

"짐은 돌궐의 계민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받드는 까닭에 친히 그의 장막에 왔다. 명년에는 반드시 탁군(?郡 : 북경 근처로 요동정벌군의 출발지)으로 갈 것이니,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알려 속히 내조하도록 하여 짐이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 하라. 그대의 왕이 입조하면 돌보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나, 만약 입조하지 않으면 계민을 이끌고 그대의 나라를 토벌할 것이다."

그러나 영양왕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쳤다. 이미 수나라와 전쟁을 각오한 고구려는 일단 남쪽 국경을 튼튼히 하여 협공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양왕이 끝내 입조를 거부하자 수양제는 611년(영양왕 22년) 2월에 고구려정벌을 공식 발표했다. 수양제의 고구려정벌 명령에 따라 전쟁동원준비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수나라 각 지방은 할당된 물자와 군사를 채우느라 백성들을 들볶았다.

산동반도의 어느 조선소에서는 조선공들이 물 속에 들어가 배를 만드느라 썩어 들어간 살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런 처참한 전쟁준비상황이 알려지자 반전의식이 급속도로 수나라를 휩쓸었다. 이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반전가요가 『자치통감』에 실려 있었는데,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 :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라는 노래)"가 그 것이다.

612년(영왕왕 23년) 1월. 모든 정벌군과 군수물자가 북경 부근의 탁군에 모였다. 수양제는 군사와 장군들을 총집결시키고 임유각에 올라 출정식을 거행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영왕왕 23년조에는 수양제가 고구려종볼 출정식을 할 때 발표한 조서를 이렇게 기록한다.

"고구려 소추(小醜 : 더러운 꼬맹이)가 혼미하여 공손치 못하고 발해와 갈석(碣石)사이에 무리를 모으고 요동과 예맥의 땅을 거듭 잠식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정벌을 반복하니 그 둥지가 잠시 흐트러졌다가, 다시 그 종족이 옹기종기 모여 냇가의 발대처럼 번성하였다. ……(중략) 이제 군령을내려 길을 떠나, 지휘를 나눠 발해를 벼락같이 엄습하고, 부여를 번개처럼 지나소탕할 것이다. 방패를 나란히 세우고 말을 당겨 서약한 뒤에 행진하고 자주 명령하고 알려서 반드시 이길 것을 알고 난뒤에 싸워라."

육군은 좌익 12군, 우익 12군, 총 24군으로 113만 3800명인데 과장하여 200만이라 하고, 군량미와 병장기 등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 수는 그 두배에 해당했다. 고구려 멸망 당시 총인구가 약 400만 명으로 추산되므로, 거의 고구려 총인구와 맞먹는 대군이 모인 것이다. 여기에 창해군(滄海軍)이라 이름을 붙인수군이 추가되는데 그 숫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바다를 떠가는 배의 행렬이 천리에 뻗었다고 하니 수군 또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런 대군을 앞에 놓고도 수양제는 조금 불안했던 모양이다. 검열을 마친 양제는 옆에 있던 근신 유질(庾質)에게 물었다.

"고구려의 땅과 인구는 겨우 우리나라의 일개 군현에 해당되는데, 지금 짐이 이 군사를 가지고 적을 치면 이기겠는가?"

사서의 기록에 나온 것으로 보아 유질이라는 신하가 선경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에는 이길 수 있사오나, 폐하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수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출발시켰다. 육군은 하루에 1군씩 요서를 향해 출발했다. 육군은 하루에 1군씩 요서를 향해 출발했다. 출발한군대가 40리를 가면 다음 군대가 출발했다. 24군이 다 출발하는 데는 40일이 걸렸고, 그 행진 길이는 9백 6십 리에 뻗었다.

2월 경에 수나라 대군이 요하에 도착했다. 영양왕은 고구려병사에게 요하에서 일차적으로 적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수나라 대군이 벌떼처럼 강에 달라붙자 강 동쪽 높은 곳에서 고구려군사가 화살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수나라군사는 좀처럼 요하를건널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수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宇文愷)로 하여금 강에 3개의 부교를만들게 했다.

그런데 수나라군사가 헤엄을 쳐 이 다리를 동쪽 강가에다 대는데 1장(丈) 남짓 모자랐다. 이때 고구려군사가 뛰쳐나와 공격하니 수나라군사는 부지기수로 죽고, 할 수 없이 강 서쪽으로 물러났다. 수양제는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부교를 늘려 만들 것을 명하니 2일 만에 완성되었다. 결국 수나라군사가 요하 ㄷ하작전에 성공하여 벌떼처럼 요동으로 밀려드니, 고구는 1만 명의 군사가 희생되었다.

612년 5월, 고구려 요동성은 수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요동성을 지키는 고구려군은 모든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수양제는 요동성을 바라보며 휘하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요동성이 항복해 오거든 이를 무마하여 받아들이고, 군사들이 성안에 난입해 함부로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요동성은 굳세게 저항했다. 고구려군은 적이 공격해 오면 굳게 지키다가 물러가면 소규모 특공대를 보내 적을 괴롭혔다. 거기에다 적절한 기만전술을 사용했다. 즉 적의 공격이 너무 거세 성이 함락될 위기에 몰리면 항복하겠다고 하고, 적장이 물러가 항복을 기다리는 사이 전열을 재정비했다. 수나라군은 고구려의 이런 전술에 지쳤다. 두달 동안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양제는 모든 장수들을 소집해 호통을 쳤다.

"그대들은 높은 벼슬과 훌륭한 가문만 믿고 짐을 놀리는 것이냐? 경도(京都)에 있을 때 그대들의 짐의 친정을 반대한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치욕을 보일까 두려워함일 것이다. 하지만 짐이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소행을 살펴 목을 베려 함이었다. 그대들은 지금 목숨이 두려워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짐이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 아는가?"

양제의 으름장에 장수들은 요동성으로 달려들었다. 양제는 요덩성 서쪽 몇십 리 떨어진 곳에 임시궁전을 짓고 공격을 총지휘했다. 그러나 요동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육군이 요동성에서 발목을 잡혀 고전하고 있을 때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에 도착했다. 수나라 수군은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했다.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으로부터 60리 되는 곳에서 고구려군의 일차 저지를 받았다. 내호아는 이 고구려군을 쉽게 격파하였다.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아직 육군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대기하자며 내호아를 말렸다. 그러나 내호아는 주법상의 말을 듣지 않고 졍예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고구려군은 전통적인 유인작전을 펼쳐 거짓 패배를 거듭하며 내호아의 군대를 평양 외성까지 깊숙이 끌어들였다. 평양 외성에 입성한 내호아의 군대는 약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 빈 절 속에 숨어 있던 고구려 복병이 기습을 했다. 혼비백산한 내호아는 간신히 대동강으로 달아났다. 승기를 잡은 고구려군은 그를 뒤쫓았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주법상이 응전해 오므로 고구려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다시 평양성으로 들어갔다. 내호아는 멀찍이 해포(海浦 : 진남포 부근)까지 물러나 다시는 공격할 엄두를 못 냈다.

수군이 복병전에 걸려 퇴각하고 있을 때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던 양제는 작전을 바꿨다. 교착상태에 있는 요동성 공격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별동대를 편성해 곧바로 고구려 평양성을 치기로 한 것이다. 즉시 우문술(宇文述), 우중문(宇仲文) 등이 거느리는 총 9군, 30만 5천 명의 별동부대가 편성되고, 그들에게 100일분의 실략과 무기, 화약 등이 지급되었다.

각각의 병사가 짊어지고 압록강까지 가야 할 장비의 총 무게는 3석 이상이 넘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군량을 버리면 극형에 처한다는 장수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요동을 출발할 때 식량의 대부분을 땅에 묻어버렸다. 보급이 뒤따르지 않는 특공작전이었으므로, 그들이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모두 기근에 시달렸다.

수나라가 30여만 명의 별동대를 파견했다는 급보를 받은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을 평양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우문술 등이 요동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

"만약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라."

이렇듯 을지문덕의 이름이 수나라 진영에까지 알려진 것으로 봐서 그는 고구려 장수 중 가장 특출한 임물임에는 틀림없다. 영양왕은 압록강을 1차 저지선으로 삼았다. 그는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적진의 상황을 알고자, 을지문덕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의 허실을 살피라고 명령했다. 압록강을 건넌 을지문덕은 단번에 수나라군대가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간파했다. 을지문덕에 별안간 항복을 표시하며 나타나자 우중문 등은 양제의 말대로 그를 사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위무사로 있는 유사룡(劉士龍)이 이미항복하였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말렸다. 그 사이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을 빠져나가 압록강으로 달려갔다. 나중에야 속았음을 깨달은 우중문은 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할말이 있다며 을지문덕을 유인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아군진영으로 돌아왔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놓치고는 내심 불안해 있다가 우문술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으니 다시 요동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공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지휘부의 의견이 엇갈리고 이것을 보고받은 수양제는 우중문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나머지 장수들을 통솔하라고 명했다. 우중문은 압록강 도하를 망설이는 각 장수들을 다그쳐 압록강을건너게 했다. 을지문덕은 싸우다가 패하는 척하고 적을 유인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 모두 져주었다. 기세등등해진 우중문의 군대는 자연히 강공일변도로 나왔다. 이런 승전 분위기 속에서 수나라 군사는 마침내 살수(薩水 :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했다. 우중문 등 수나라 장수들은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멀리 보이는 평양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은 평양성을 보자 허기와 짙은 고립감이 수나라 군영을 덮쳤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칭송하는 시한 수를 지어보냈다.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신묘한 그대의 전략 전술 천문지리에 통달했도다.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싸움마다 이겨 공 이미 높은데 족한 줄 알고 이제 그만둠이 어떨까.

이 유명한 시는 『삼국사기』「열전」"을지문덕전"과 『수서』"우중문전"에 모두 실려있다. 이미 싸울 기력을 잃은 수나라 진영에 을지문덕은 그럴 듯한 명분을 마련해준다. 즉 을지문덕은 다시 우문술에게 사자를 보내, 만약 장군이 군사를 돌려 물러가면 고구려왕을 받들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찾다뵈겠다고 하며 거짓 항복의 뜻을 전한다. 우문술 등은 그것이 거짓인 줄 알지만 평양성이 험고하고 자신의 군대는 지쳤으니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킨다.

수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고구려군대에 총곡격 명령이 떨어진다. 수나라군사는 고구려의 추격군과 일진일퇴를 벌이며 살수를 건넉나다. 이때 을지문덕의 정예병이 철수하는수나라군대의 후군을 급습한다. 강에 설치된 부교를 점령한 고구려군이 부교를 끊자 강을 건너던 수나라군사는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부교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수나라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한다. 적장을 잃은 수나라군을 을지문덕의 군사가 휩쓸어 수나라군사는 거의 괴명되고 살아남은 병사를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의 길을 하루 만에 달아난다. 그리고 우문술 등의 패전소식을 전해들은 내호아의 수군도 대동강 입구에서 도망쳤다.

급보를 받고 요동에서 달려온 수나라 구원군이 압록강에서 저지하자 을지문덕은 추격을 멈추고 형양으로 돌아왔다. 출발할 때 30만 5천 명이었던 수나라 별동군이 다시 요동에 모였을 때는 겨우 2천 7백 명이었다. 거의 30여만 명의 병사가 고구려 땅에 뼈를 묻었으니, 이것이 "살수대첩"이다.

『삼국사기』에는 수양제가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7월에 요동에서 철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중에 한가지 특이한 점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백제 무왕의 행동이다. 백제 무오아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수양제에게 사진을 보재 돕겠다는 뜻을 전한다. 수양제는 기뻐하며 무왕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사실 무왕은 안으로 고구려와 내통하였다. 무왕은 수나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수나라군사의 출정일을 알아내고, 수나라군사가 요하를 건너 요동을 공격하자 백제군도 군비를 엄하게 갖추고 출동했으니 수나라군대를 돕겠다고 소리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양쪽을 쥐고 있었다. 이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않다.


3. 수나라의 3차 침공

요동성의 끈질길저항과 별동부대의 전멸,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의 패배로 수양제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으면 간신히 복속시킨 돌궐마저 배반할 우려가 있었다. 수양제난 새해가 밝자 제2차 고구려정벌의 조서를 발표했다. 전국의 병사들을 징집하고 군량미와 기타 군수품을 징발해 다시 탁군에 집합시켰다. 613년(영양왕 24년) 2월, 수양재는 신하들에게 말한다.

"고구려의 한낱 작은 적들이 상국을 업신여기니, 짐은 이제 바다를 ㅤㅃㅒㅤ앗고 산을 옮기는일도 능히 할 수 있거늘, 하물려 이따위 적에 대해서야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좌광록대부 곽영(郭營)이 간하였다.

"융적(고구려)이 예를 잃은 것은 신하들이 처리할일입니다. 새앙쥐 한마리를 잡으려고 천근의 쇠뇌(화살)를 쏘지 않는 법이니, 어찌 천자의 위를 욕되게 하면서까지 작은 도둑을 대적하시려 하십니까?"

그러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양제는 이번에는 작전에 약간 변화를 주었다. 을지문덕에게 패한 우문술(宇氏는 황제의 친척들이다)을 다시 기용해 별동대장으로 삼았다. 양제는 우문술 등에게 요동에 한눈 팔지 말고 곧장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직행해, 바다를 건너오는 내호아의 수군과 합세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장수들을 이끌고 예전처럼 요동으로 진격했다.

요동으로 진격한 양제는 여기서도 작전을 바꾸었다. 즉 월등한 군사력으로 요동에 산재한고구려으모든성들을 분산·공격하여 전선의 다각화를 꾀했다. 그러나 고구려 성들은 문을 굳게 닫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요동벌판에 불개미처럼 깔려 있는 수나라군대 때문에 고구려의 각 성은 서로 도울 수가 없었고, 오직 자체 역량만으로 수나라 공격을 막아야했다.

요동성은 수나라에게나 고구려에게나 군사 요충지이다. 당연히 두 나라의 모든 화력은 요동성에 집중되었다. 수양제는 요동성의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 모든 공성기구(攻城機具 : 성벽을 공격하는 무기)가 동우너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수나라 군사가 동원한 새로운 무기를 기록해 놓고 있다. 고구려군이 보기에 그 신무기들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먼저 비루(飛樓)란 공격무기가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해 하늘 높이 솟은 원두막 같은 통나무집이다. 지붕에는 소가죽을 씌워 화살이나 창이 뚫지 못하게 하고 그 속에 숨어서 성격을 공격하는 무기이다. 다음으로 동거(棟車)라는 무기가 첫선을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장갑차 같은 것이다. 커다란 통나무상자에 네 바퀴를 달고 그 속에 숨어 성벽에 접근한 다음 쇠망치 같은 것으로 성벽을 내리쳐 파괴하는 무기이다.

또 운제(雲梯)라는 무기가 있다. 이 무기는 오늘날 소방차 같은 것으로, 여섯개의 바퀴를 단 동거에 사다리를 설치해 놓고 성벽에 접근한 다음 사다리를 펼쳐 성벽을 넘을 때 사용된다. 지도(地道)라는 땅굴을 파는 기계도 있다. 사면을 철갑으로 두른 다음 성벽에 접근시켜 그 안에서 두더지처럼 성벽 밑을 파서 허물어뜨리는 기계다.

수양제는 이런 무기를 총동원해 요동성을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러나 요동성 안의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고구려군은 성벽이 무너지면 맹수처럼 뛰쳐나와 수나라군을 물어뜯고 다시 들어가 무너진 곳을 막았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수양제는 대규모 물량작전으로 나섰다. 그는 군사들에게 명해 백만 개의 흙포대를 만들어, 그것을 요동성 높이만큼 쌓았다. 양제는 이것을 어량대도(魚梁大道)라고 불렀다.

그리고 팔륜누거(八輪樓車)라는 것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퀴가 여덟 개 달린 높은 수세로 어량대도와 요동성 성벽 사이를 돌아다니며 군사르 운반하고 공격하는 용도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무기가 완성될 무렵 중국대륙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예부상서로 있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였다. 양현감은 군수품 조달을 총책임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정벌로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는 것을 알고, 군량미와 병장기를 수양제가 있는 요동에 보내지않고 쌓아두었다가 의용군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것이다. 많은 수나라 백성들이 이 반란에 동조했다. 수양제는 그날 밤, 모든 병장기와 군수품을 그대로 두고 황급히 요동을 빠져나갔다.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철군을 믿지 않아 2일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동정을 살폈다. 이때 수양제의 핵심측근으로 병부시랑(지금의 국방차관)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에 투항해왔다. 곡사정은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현감과 밀통하고 있었는데, 양제의 후환이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을 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성문을 열고 퇴각하는 수양제의 대군을 요하까지 추격했다. 물론 반격을 우려하여 항시 80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추격했다. 마침내 수양제가 요하를 건너 본국으로 감으로써 고구려는 다시 한 번 수양제의 대군을 물리쳤다.


4. 수양제의 4차 침공과 수나라의 패망

본국으로 돌아간 수양제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양현감을 잡아 주살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614년(영양왕 25년) 2월, 또다시 고구려정벌을 선포하고 군사를 동원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전쟁동원에 반대하는 반란과 소요가 수나라를 휩쓸었다. 특히 고구려정벌의 전진기지가 된 산동지방은 옛 북제와 북주의 본거지로,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수왕조에 대해 일제히 봉기를 했다. 뿐만 아니라 남조의 옛 땅에서도 가혹한 징발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수양제는 이번에는 요하를 넘지 않고 먼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을 요동반도에 상륙시켜 선공했다. 고구려의 비사상(卑奢城 : 지금의 대련만부군 해변가)이 내호아의 ㄱㅇ격에 함락되었다. 내호아는 곧바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을 향햐 진격했다. 이때 내호아에게 양제의 공격중단과 철군명령이 하달되었다. 고구려가 수양제에게 항복의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고구려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특히 적을 국내로 끌어들여 싸워야하는 고구려로서는 전쟁을 한 번 겪을 때마다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에 의해 요동의 요충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내에서 주화파가 힘을 얻었다. 마침내 영양왕은 수양제에게 화의를 청하고, 이 화의제의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이해 고구려로 망명한곡사정을 수양제에게 압송하는 조치를취했다. 고구려의 화의제이를 받은 수양제는 즉시 평양성으로 향하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곡사정과 고구려 화의사신을 대동하고 서경으로 돌아갔다.

서경으로 돌아온 양제는 곡사정에게 "하늘과 땅이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인"의 올가미를 씌우고 참혹하게 죽였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죽은 시체를 갈기갈기 찢은 다음 펄펄 끓는 물에 삶아서 뼈를 추려내 불에 태우고 그 재를 바람에 날려 버렸다.

수양제는 영양왕에게 입조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핑계를 대며 입조하지 않았다. 수양제는 고구려사진을 억류해 놓고 만약 입조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협이었다. 중국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반란에 휘말려 618년 수양제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긍릉에서 부하에게 살해된다.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반란군은 장안을 점령하고 수양제의 아들로부터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당나라르 건국하였다.



출 처 : [기타] 임병주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Comments

찰리신^.^~
형님 그래야 왜곡한사람들이 무서워하죠.ㅋㅋ 
명랑!
'찰리신'아 하나님 너무 들이댄다...emoticon_003ㅋ 
찰리신^.^~
역사왜곡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셔emoticon_019 
화이트
아주 제밌게 읽었습니다.emoticon_004 
일레인
바쁘지만 읽어써요....
나쁜짱깨놈들......emoticon_018 
명랑!
그래서 심심한 분만 읽으라고....emoticon_012 
그날이오면
웁  너므 기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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